영상물의 기준이 SD(표준해상도; 세로해상도 480선 이하)에서 HD(고해상도; 세로해상도 720~1080선)로 시프트하는 대변혁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는 시점인지라, 이 차세대 영상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매체 전쟁이 물 건너에서는 슬슬 불이 붙으려 하고 있는 게 요즘입니다. ...아, 물론 국내에서는 아직은 남의 나라 얘기인 것 같습니다만.
게이머라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S단자를 처음 끼우고 세상이 달라지는 느낌(...)을 받았던 게 대략 10년 전인데 벌써 DVD와 컴포넌트 단자(...써본 적은 없음)를 지나 HDTV와 HDMI를 논하는 시점에 왔으니, 세월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들일 돈이 점점 늘어간다고 해야 할지, 뭐 그런 기분. 당장 HDTV 살 돈이 없어서 VGA 단자 물려서 모니터로 쓰고 있는지라(...).
어쨌든 게이머들로서도 역시 이 차세대 영상물 전쟁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는 것이, 당장 차세대 게임기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HDTV 없으면 제대로 된 영상 볼 생각 말아라인데다(...아, Wii는 예외려나요) PS3는 아예 세계 최초의 염가형 블루레이 디스크 플레이어를 표방하고 있는 터라 당장 게이머 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뭐 끼워팔기다 게이머를 볼모로 삼는 처사다 말은 많습니다만, PS3가 이제는 게이머만 사는 물건이 될 수는 없다는 SCE의 의지 표명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길게 썰을 풀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일단 패스.
어쨌든, 국내에서는 HDTV 붐은 신나게 일고 있어도 정작 차세대 HD매체는 하나도 제대로 선보이고 있지 않는지라(DVD 셀스루 시장이 바닥을 벅벅 기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듭니다만) 아직은 먼나라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 실정이기는 한데, 일단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HD DVD와 블루레이 디스크(BD)의 우열이나 향후의 전망 같은 것을 되는대로 얘기해볼까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이며 비전문가이자 단순한 소비자로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니만큼, 심각하게 읽지 마시고 그냥 재미삼아 넘어가 주시는 게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냥.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꺼내자면,
소비자 ─ 그것도 대한민국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BD가 HD DVD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면을 따져봤을 때 말이지요.
게다가 현재까지의 시장 판도로도, 적어도 현재로서는 BD가 HD DVD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됩니다. 선점효과와 초기의 인스톨 베이스, 컨소시엄 참여사의 규모 등이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는 매체 전쟁인 만큼, HD DVD는 BD를 이기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할 겁니다. 그것도 최소한 금년 내에.
사실 BD와 HD DVD는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차이점이 크지 않은 매체입니다. 둘 다 405nm의 청자색(blue-violet) 레이저를 이용해 데이터를 읽어들이는데다 매체 외형 역시 이른바 CD 표준인 지름 12cm, 두께 1.2mm의 플라스틱 원반이거든요.
두 매체가 차이를 두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데이터 기록의 조밀성과 데이터 기록면의 위치. BD는 렌즈의 개구수(NA; Numerical Aperture)가 0.85로서 HD DVD의 0.65보다 더 조밀하고, HD DVD의 데이터 기록층이 디스크 아랫면을 기준으로 0.6mm 부분에 위치하는 데 비해[각주:1] BD는 0.1mm(!) 부분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BD는 디스크 하단면 스크래치에 DVD보다 취약하다는 단점을 갖게 됩니다만[각주:2], 상단에 그만큼의 공간을 더 벌게 되기 때문에 향후 다층 레이어(multiple layer)를 쌓아 용량을 늘이는 데 훨씬 유리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때문에 BD는 현재 6~8층 레이어까지 쌓아올리는 데 성공해 최대용량 200GB의 고지(물론 아직은 실험실 단계)를 선점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요.
DVD와 BD의 기록방식 비교. 기록밀도는 픽업부 렌즈의 개구수(NA)와 레이저의 파장(wavelength)으로 결정되는데, 두 요소가 모두 DVD보다 줄어듬으로써 레이저 스팟의 면적 역시 DVD 대비 19%가 됩니다. HD DVD는 NA가 0.65이므로 이보다 약간 더 두껍습니다.
HD DVD는 그동안 BD와의 차별점이자 우월요소로서 매체 단가의 저렴함(및 제작 용이성)과 BD의 용량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만, 사실 광매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둘 다 커다란 우월요소는 되지 못합니다. 어차피 HD DVD나 BD나 제조공정 자체는 거기서 거기인 광매체인 만큼 먼저 기기 많이 깔고 물건 대량생산하는 쪽이 원가절감에 더 유리할 것임은 당연지사고, 매체 역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용량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지라 일단 당장 대용량이고 향후에도 더 용량을 늘일 여지가 충분한 BD 쪽이 훨씬 유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디오 재생시 사용하는 코덱도 거기서 거기인지라 그런 점에서는 'BD의 용량은 과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매체라는 게 비디오 기록뿐만 아니라 데이터 스토리지로 사용하는 빈도도 제법 될뿐더러 2시간 이상의 HD 영상을 무압축으로 한방에 집어넣을 수 있는(싱글 레이어 25GB 기준) BD 쪽이 훨씬 매력적인 것입니다. 적어도 매체라는 측면에서는.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기술적으로는 당연히 BD가 앞선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하지만 세상이 꼭 기술적으로 앞선 매체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죠. 당장 세계 매체전쟁 역사에 남은 장렬한 패배 사례인 저 VHS 대 베타맥스가 증명하듯(...).
하지만, 이번에는 BD가 간단히 베타맥스 꼴이 될 것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BD 진영의 수장 아닌 수장인 소니부터가 베타맥스의 패배를 와신상담중일 테니까.
일단 BD 진영은 컨텐츠와 드라이브 양면에서 전사적인 지원을 퍼붓고 있는 소니가 핵심에 있는데다, 소니 픽처스를 중심으로 월트 디즈니, 20세기 폭스, 워너 브러더즈 등 대형 헐리우드 공급자들과 TDK, HP, 샤프, DELL 등 제조업계의 대형 회사들, 컨텐츠 크리에이터들에게 강한 신뢰를 얻고 있는 애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풀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컨소시엄 참여사들의 라인업만으로 비교하면, 명백히 HD DVD의 열세라고 봐도 될 정도.
물론 그중에는 양다리를 뛰고 있는 회사도 적지 않고(특히 컨텐츠 쪽에서) HD DVD는 이미 컨텐츠의 출시까지 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HD DVD 진영은 지나치게 제조업체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고나 할까. 그나마 최대의 변수 격인 MS가 얼마나 해주느냐에 달렸지만, 윈도우즈 비스타에서 HD DVD를 표준 지원하고 Xbox 360에서 외장 드라이브를 달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다소 역부족이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드라이버야 필요한 사람이 깔면 끝이고, 외장 드라이브의 보급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적어도 매체 보급의 관점에서는, PS3처럼 아예 내장시켜 버리는 게 제일 파워가 큰 것이지요.
사실, BD 대 HD DVD의 경쟁구도에 가장 커다란 변수가 될 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름아닌 PS3의 존재.
어쨌든 HD DVD는 금년 3월을 기점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런칭을 개시했고[각주:3], 기기와 타이틀 역시 시장에 나와 있는 상태. 하지만 지금까지는 마땅한 폭발력이 없이, 그저 우리가 먼저 나왔다 상태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적어도 폭발적인 보급을 기대하려면, 양쪽 시장 모두 연말상전과 할리데이 시즌을 노려야겠지요.
그리고 그 폭발적인 보급이 기대되는 시기에, BD 진영에서는 PS3가 등장합니다. 적어도 HD DVD 진영에는 BD쪽의 PS3에 비견될 만큼의 폭발적인 보급력을 기대할 수 있는 전용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나오기 힘듭니다. 런칭 후 전세계에 3개월간 6백만대를 팔겠다는 플랜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킬러 플레이어인데다가, 혹여 그 판매량의 1/3만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게임기 입장에서는 엄청난 적신호겠지만) 적어도 BD 플레이어라는 가전의 관점에서는 HD DVD 진영의 어떤 전용 플레이어도 넘볼 수 없는 보급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적어도 상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보다 더 강력한 변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SCE(라기보다 소니 그룹)는 PS3는 BD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가를 감수하고서라도. 기기가 깔리는 것과 그 기기에서 BD 영상물을 얼마나 많이 사서 봐줄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일단 기기가 깔린다는 것의 메리트는 대단히 크고 PS3가 BD를 기본 채용함으로써 쥐게 되는 캐스팅 보트로서의 이니셔티브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물론 대용량 미디어로서의 이점도 있겠고.
이미 PS2에 DVD 비디오 재생 기능을 내장함으로써 그 파괴력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알고 있는 SCE로써, BD의 내장은 여러 가지로 손해볼 것 없는 꽃놀이패인 셈입니다. 생산비용의 디메리트를 제외한다면.
결국 SCE에게 있어서는 게임 뿐만 아니라 HD 영화 및 영상 컨텐츠 역시 PS3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컨텐츠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 만큼 PS3의 런칭에 맞추어 BD 타이틀로 누구나 살 만한 대작 영화 컨텐츠가 같이 발매된다면, 과거 PS2 초기 시절의 [매트릭스]처럼 웬만한 대작 게임에 못지 않은 훌륭한 동시발매 컨텐츠이자 판매의 견인차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될지는 일단 미지수지만.
뭐, 이런저런 골치아픈 회사 단위의 전략 다 제하고 그냥 일반적인 소비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결국 HD DVD보다는 BD 쪽이 여러 모로 훨씬 낫습니다. 용량 많겠다 앞으로도 더 많아질 소지가 있겠다 그런데도 가격은 비스무리하겠다[각주:4].
게다가 한국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BD가 우세해질 경우의 이점이 하나 더 있는데...... 다름아닌 지역 코드의 메리트입니다. HD DVD는 DVD 포럼의 공인 포맷이기 때문에 지역 코드 역시 기존 DVD 비디오의 규격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즉 미국은 1, 일본은 2, 한국 및 동남아권은 3 등), BD는 컨소시엄 내에서 새로 제정한 자체 지역 코드를 따릅니다. 그것도 아주 심플하게 다음과 같이.
● 코드 B : 유럽, 아프리카
● 코드 C : 중국, 러시아 및 기타 지역
...즉, BD가 차세대 영상물 시장의 패권을 잡을 경우 국내 소비자는 코드프리같은 귀찮은 짓을 할 필요 없이 미국과 일본의 모든 영상물을 자유롭게 사다가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 되겠습니다. 과거의 NTSC나 PAL처럼 영상신호규격이 달라서 못 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HDTV 신호의 경우, 한국과 미국은 ATSC 규격을 사용하고 일본은 독자적인 ISDB 규격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동일 코드권 내에 소속되니만큼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커다란 이점인 셈.
그 외에, BD의 경우 국내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규격 개발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컨소시엄의 핵심기업(Board of Directors)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BD 규격의 성공시 나름의 로열티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 정도도 국내로서는 이점이 될 수 있을듯(양사는 HD DVD 진영에서는 단순 참여사입니다. 아무래도 BD 쪽이 더 이득이겠지요).
...뭔가 참 쓸데없이 많이도 썼는데(...),
여튼, 개인적으로는 BD에 더 주목하고 있고 BD쪽에 좀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게다가 PS3에 BD 드라이브가 기본적으로 내장된다는 것으로 인해, BD의 대두가 앞으로의 게임계에 큰 변화(그게 포지티브든 네거티브든)를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요.
PS3는 잘해봐야 게임기인데 거기다 무리하게 BD 드라이브를 달아서 가격만 높게 올리고 망하려고 작정했냐...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는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PS3에 BD를 채용한 건, 훗날 세기적인 결단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도 봅니다. 그 이유는 위의 본문에서 장황하게 써놓은 바와 같고요.
물론 어디까지나 없지 않다이지, 현재로서는 확실히 네거티브성인 게 사실이니 일단 지켜봐야겠죠.
여하튼, 재미있게 돌아가는 형국입니다. 과연 올해 연말을 장식할 기기는 무엇이 될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국내 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상상이야 여러 갈래로 뻗치긴 합니다만. 음.
- 즉, HD DVD는 0.6mm의 투명 원반 2개 사이에 데이터 기록층이 샌드위치된 형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DVD를 쪼개(...)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구조는 DVD 역시 동일합니다. 그래서 HD DVD가 일반 DVD 공정상에서 싸게 제조할 수 있는 것이고요. [본문으로]
- 이것때문에 BD는 최초 1.0 규약에서는 두꺼운 플라스틱 카트리지 내에 수납해야만 했지만, 이렇게 하면 박형(薄形) 드라이브의 제조나 디스크의 수납/보관, 제조 단가 등 여러 면에서 불리해서 당시 BD의 대표적인 취약점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TDK가 'DURABIS'라는 BD 전용 내구성 향상 기술을 개발해 BD 2.0 규약에 포함시켰으므로, 현재의 BD규격에서는 카트리지가 없고 내구도도 꽤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 3월 31일 도시바가 전용 플레이어 'HD-XA1'을 일본에서 발매했고, 4월 7일부터는 포니 캐년이나 쇼치쿠 등의 퍼블리셔에서 타이틀도 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북미에서도 4월 18일부터 타이틀이 출시되었고, [라스트 사무라이]나 [오페라의 유령]을 시작으로 30타이틀 이상이 발매되어 있습니다. BD 쪽은 북미에서는 6월 20일부터 타이틀 출시가 개시되었습니다. [본문으로]
- 북미를 기준으로 보자면, HD DVD 타이틀과 BD 타이틀의 소매가격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대략 24~34달러선). 경쟁상대가 있기 때문인 탓이 크겠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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